아유타야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어느나라나 보여주기 싫은 역사가 있을 텐데요, 태국에서 아유타야가 그에 해당합니다. 아유타야는 250년 전까지 태국의 수도였습니다. 250년 전이면 현재와 오래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유타야가 언제 생겼을까요? 잠깐 아유타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태국 최초의 왕조 수코타이는 람캄행 대왕의 사후 그 세력이 약화됩니다. 아유타야 왕조는 약해진 틈을 타 수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여 태국의 통일을 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350년 아유타야 왕조 우퉁왕이 아유타야를 건설합니다. 조선이 건국한 시기가 1392년과 비슷한 시기입니다.
아유타야 차이 와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
아유타야 왕조는 400년 동안 태국 왕조 중에서 가장 번창했다고 이야기 되는데요, 특히 무역이 발달하였습니다. 중국, 스리랑카 등 이웃 나라와 무역은 물론 17세기에는 유럽 국가 중 네덜란드와도 무역했고 일본 그리고 조선과도 무역을 행해왔습니다.
강가에 있어 아름다운 차이 와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
아유타야 왕조는 절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금지했고 왕을 신격화하는 크메르족의 전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절대적인 권력과 경제권을 장악한 아유타야 왕조는 그들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사원 및 크고 작은 건축물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1767년 3월 버마(현재 미얀마)의 공격으로 417년의 찬란했던 아유타야가 멸망하게 됩니다.
불상 머리가 없는 차이 와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
정복당한 아유타야는 참혹한 살인이 이어졌고 아유타야의 상징인 많은 건축물들은 버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금으로 도금된 거대한 불상을 산산조각 부수어 금을 녹여 가져갔고 많은 불상의 머리가 잘려나갔습니다. 그 뒤 수도를 방콕으로 이동하면서 번성했던 아유타야에 자재를 가져다 썼고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50년이 지난 태국인들에게는 다시는 겪지 말아야할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어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차이 와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
소개할 차이 와타나람 사원은 많고 많은 아유타야 사원중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사원으로 손꼽힙니다. 1630년 아유타야의 쁘라사통 왕은 어머니를 위해 차이 와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을 건축하게 됩니다.
차이 와타나람 사원은 방콕의 왓 아룬(새벽사원)과 비슷한 느낌을 주네요. 왓 아룬처럼 짜오프라야 강변에 자리 잡은 차이 와타나람은 2011년 홍수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어요. 그 당시 피해 금액이 4억정 정도라고 합니다.
옹박이 버려져 있는 아유타야 왓마하탓(Wat Mahathat) 사원
차이 와타나람 사원은 아유타야 중심지와 떨어져 있어 뚝뚝이를 타고 가야한는데요, 그리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사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지금은 역설적으로 그 의미와 반대로 버마에게 굴복 당한채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더 가슴시린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