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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정보] 태국 역사 수코타이 왕조부터 라마 9세까지

중국에서의 남하와 수코타이 왕조


태국인의 역사는 서기 약600~700년 경부터 시작됩니다. 타이족은 크메르왕국(앙코르 왕조, 현 캄보디아)의 속국으로 있었고 그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중국 남쪽에서 지금의 태국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1238년에 수코타이 왕조를 세우고 최초의 통일 왕조가 됩니다. 그 시기에 고려 제23대왕 고종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고려의 역사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5년간 지속되었으나 수코타이는 1238년부터 1365년까지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코타이 왕조

수코타이


현재의 태국인들이 쓰고 있는 태국 문자는 수코타이 왕조의 람캉행대왕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국어는 한글보다 약 80년 정도 먼저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너무 난해해서 쉬운 문자는 배우기 쉬운 문자는 아닙니다. 수코타이 왕조는 1365년 람캄행대왕의 사후 약해졌고 세력을 커진 아유타야가 수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수코타이 왕조

수코타이


태국의 삼국시대와 아유타야의 전성기


람캄행 대왕 이후 수코타이 왕조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 우퉁왕이 남쪽으로 내려가 1350년 아유타야 왕를 세웁니다. 조선의 건국(1392년)과 비슷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국은 중부에 아유타야가 있었고 중북부에는 수코타이 그리고 북부에는 란나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유타야의 세력이 커지자 수코타이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란나 동맹을 맺어 아유타야를 견제합니다. 아유타야가 세력이 더 강해지면서 태국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아유타야

아유타야 옛날 모습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강 주변에 세워졌습니다. 3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라 방어하기가 굉장히 용의했어요. 수로를 가지고 있어 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국가가 이 무역을 독점함으로서 굉장한 부를 축적할 수있었습니다. 2011년 태국의 홍수 피해를 기억하실겁니다. 그 때 3개의 강의 범람해 아유타야 유적지가 모두 물속에 잠기기도 했어요.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곳입니다. 


아유타야 지도

아유타야 지도


아유타야는 제도적으로 현대 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아유타야는 수코타이의 제도보다 크메르 왕조의 절대 왕권을 표방했습니다. 불교가 국교로 제정됐던 것도 아유타야 때부터입니다. 전통의상, 법률 등이 현대 태국 사회까지 이어졌습니다. 1350년부터 1767년까지 410년 동안 33명의 왕이 아유타야를 다스렸고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왕이 들어섰어요. 



아유타야

아유타야 사원



아유타야의 분열, 16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강했던 나라 


포르투칼인들이 서양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태국에 왔고 그 시기가 1511년입니다. 이후 아유타야는 '킹덤 오브 시암'으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도 했어요. 조지 모델스키 교수(조지 워싱턴 대학, 정치학자)는 '아유타야는 170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유타야는 그 당시 인구가 100만 명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포르투칼은 물론 유럽 나라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그리고 일본과도 교역하기도 했어요. 아유타야의 최전성기 시절 영토는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까지 뻗었고 캄보디아와 버마, 치앙라이까지 펼쳐졌습니다.


아유타야 홍수 불상

아유타야 불상과 홍수


아유타야의 분열과 톤부리 왕조의 등장


한없이 오래만 갈 것 같았던 아유타야는 내부 정치적인 문제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그 무렵인 1760년과 1767년 버마는 통일을 이루고 난 뒤 아유타야를 공략합니다. 


아유타야는 지리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공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버마는 그들의 수로를 봉쇄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합니다. 아유타야는 수개월간 고립이 되었고 서서히 침공당하고 맙니다. 당시 에카타 왕이 아유타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아유타야 왕가는 불행하게도 멸족되었고 아유타야도 함께 사라지게 되았어요. 


하지만 태국은 버마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고 수백년에 걸쳐 오랜세월 전쟁을 합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태국 사람들은 버마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시 버마(미얀마) 남자들은 힘이 쎄고 골격이 좋았고 여성들은 피부가 하얀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유타야의 분열

아유타야의 분열


1760년 버마가 아유타야를 침공 이후 여러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탁신은 7년 뒤 톤부리에 국가를 세우고 분열된 태국을 통일시킵니다. 아유타야는 역사 뒤 안 길에 남게 되었고 새로운 톤부리 왕조가 탄생하게 됩니다. 톤부리 왕조는 탁신부터 현재 왕인 라마 9세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톤부리 왕조

톤부리 왕조 


짜끄리 왕조의 등장, 라마1세부터 9세까지 


딱신 대왕은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통일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태국인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는왕입니다. 짜끄리장군은 1782년 탁신대왕의 뒤를 이어 1782년 라마1세가 되어 태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짜끄리 왕조가 시작된 것이죠. 짜끄리왕은 1782년 수도를 차오프라야강 끼고 있는 방콕으로 옮깁니다. 


짜끄리 왕조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가 압박을 가했으나 뛰어난 외교력으로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유일한 국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반면 태국과 오랜 전쟁을 벌인 버마는 192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이후 폐쇄정책으로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립니다.



태국인들의 자랑 중 하나가 식민지였던 적이 없었다는 점과 한국 전쟁에 파병했다는 점인데요, 태국은 6.25 전쟁 때 미국 다음으로 2번째로 군사를 보낸 국가이며 육군 보병 1개 대대, 해군 군함 9척, 공군 수송기 편대, 그리고 의료지원단으로 구성된 1만5천 여명을 한국에 보냈습니다. 140명 정도가 사망 및 실종되었고 120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 뒤에도 1972년까지 한국 재건에 힘썼다고 합니다. 


태국하면 옹박 "욜라 뽕따이"라고 하면서 개그 소재로 쓰이고 실제로 동남아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태국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되는 나라이지요. 한국이 어려울 때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을 위해 피흘린 국가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태국인들은 정말 자랑할만 합니다. 




탁신 대왕라마 1세

왼쪽 그림: 탁신 대왕, 오른쪽 그림: 라마 1세


태국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인 오늘날 까지 


태국하면 쿠테타의 나라이기도 한데요, 1932년은 라마 7세 때 장교들과 공무원들이 중심으로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쿠테타가 성공하면 혁명으로 바뀝니다. 이 혁명 이후로 태국은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혁명 정부는 당시 세상 물정 모르던 10살 꼬마였던 마히돌을 왕위에 앉힙니다. 마히돌은 라마 8세가 됩니다. 마히돌은 현 태국 국왕 푸미폰의 형이었어요. 쿠테타로 왕위에서 내려온 라마 7세는 "무릇 군주는 선택된 소수가 아닌 국민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방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인 라마 8세 다리

방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인 라마 8세 다리



1940년 이후 중국과 인접한 나라들은 공산주가 등장하면서 이데올로기 혼란을 겪었고 태국 또한 이 공산주의와 싸워야했죠. 1946년 라마 8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현 푸미폰 국왕은 그 당시 스위스에서 학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졸업 후 1950년 라마 9세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과거 절대 왕정시대의 행사인 왕실 바지행렬, 볍씨 줍기 행사 등이 되살아나기도 했어요.


푸미폰 국왕

푸미폰 현 국왕, 라마 9세 젊은 시절


1973년 군부정권을 상대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납니다. 국왕은 왕실을 개방했고 시위대와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모색하는데요, 여론을 중시해 타놈 군부 정권을 퇴각시켰고 탐마삿 대학학장인 산야을 수상으로 임명합니다. 푸미폰 국왕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사태를 수습했고 정치적으로 갈등이 있을 때마다 중재를 해왔습니다.


1980년까지 크고 작은 쿠테타로 나라가 혼란스러웠으나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었고 옵니다. 1992년 또 쿠테타가 있었는데요, 수친다 장군의 쿠데타 세력과 잠롱 전 방콕시장을 중심으로 한 시민 세력이 충돌 했을 때 수친다를 망명길에 오르게 합니다.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중재 능력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푸미폰 국왕, 라마 9세 현재 모습



태국의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국 사시는 분들은 교양삼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국인들과 대화할 때 상당히 유용하게 쓰입니다.


수코타이 왕조 -> 아유타야 왕조 -> 톤부리 왕조 -> 짜크리 왕조  


수코타이 왕조: 람캄행대왕 -> 태국어 창제 

아유타야 왕조: 우퉁왕 -> 아유타야 건국

톤부리 왕조: 탁신대왕 -> 태국 통일

짜끄리 왕조: 라마1세 짜크리왕 -> 방콕 수도, 라마9세 푸미푼왕